심술쟁이

in SteemZzang •  8 months ago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진다.
어느결에 바람까지 합세해서 눈보라를 일으켜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데
벽에 붙어사는 분양 현수막은 벽을 두드리는 것으로 모자라 몸부림이고
멀뚱하니 서있던 에어간판을 다짜고짜 길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겨우내 반짝이던 사철나무잎이 눈속에 묻히고 키작은 백양나무도 앉아서
머리 없는 눈사람이 되고 있다. 은행 씨디기로 들어가려던 사람은 경사진
길에서 어린 날이 떠오르는지 계속 미끄럼을 타고 연세보다 훨씬 젊은
할머니의 색동우산이 바람과 싸우다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가로등이 켜지는 골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들뛰는 바람은 길 건너 은행이
셔터가 어둠처럼 스르르 내려간 다음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다급한
레카차 경광등이 꼬리를 감추고 김OO 내과 간판이 어둠에 기대고 잠을
청한 다음에야 슬그머니 떠나갔다.

염화칼슘에 질척이는 골목을 걸어 어느 집 문앞에서 기다리던 아주머니는
헌 신문과 박스를 받아들고 고맙다고 청국장 한 덩어리를 건네고 질척질척
걸어간다. 빵이 안 팔려 청국장 전국택배를 하며 겨울을 보낸다.

안경집도 일찌감치 빛을 끄고 어둠을 들여놓는다. 요양보호사 일은 줄고
흰머리는 늘어나는데 쏟아지는 눈이 쌀이었으면 좋겠다며 허망한 눈길을
하늘로 던지며 구약시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교회 옆집에 살아도 교회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함박눈도 바람도 자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빈 길 가로등 몇이
눈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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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 폭설과 눈보라 몰아치는 풍경을 어쩌면 이렇게 잘 묘사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