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 응모작 – 수필] 제일 큰 털신 주세요.

in SteemZzang •  8 months ago 

제일 큰 털신 주세요.

벌써 아득한 옛날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사회에 나가 월급을 탓을 때였다. 내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는 자부심도 컷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월급을 봉봉투에 현금으로 받던 시절이라 그 자리에서 세어보았다. 가고 싶은 곳도 많았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빨리 집에 가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주말이나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주말이 되어 부모님 선물을 준비했다. 그 때는 첫 월급 타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 사드려야 좋다는 말이 있었다. 내복이 그 정도로 귀한 선물이었던 것 같기도 했고 가까운 사이에는 몸이 닿는 걸 선물로 하는 게 좋다는 뜻도 있었다. 내복을 사려고 속옷 가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정확한 사이즈를 몰랐다. 엄마는 워낙 날씬하다고 소문이 나신 분이라 특별이 신경 쓰지 않고 빨간 내복을 골랐다. 아버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주인 아주머니께서 주시는 대로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허전했다. 남들 보면 집에 올 때 커다란 정종 병을 들고 오는 것 같았다. 나도 정종을 한 병 살까 하다 그것보다 겨울이니 털신을 사 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이번에는 신발 가게를 찾았다. 털신도 엄마 발에 맞는 것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 발에 맞는 걸 사면 엄마의 버선발에 맞을 것 같아 내가 신어보고 맞는 걸로 샀다. 그런데 아버지 신발은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커다란 신발만 보면 끌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마루 끝에 서서 가만히 보고 있다 제일 큰 신발을 신고 질질 끌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들키면 바로 신발을 빼앗기고 나는 울면서 떼를 썼다. 큰 신발 사달라고 우는 나에게 할머니 신발을 신겨주시면 그대로 동댕이 치고 울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 신발은 언제나 제일 큰 신발이었고 우리 아버지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제일 큰 털신으로 달라고 했다.

마장동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탔다. 버스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 없이 뿌듯했다. 내 목소리를 들으시면 한달음에 문밖까지 달려나오셔서 손을 잡아주실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했다. 하얀 눈이 쌓이 산골길을 지나 종점에 내렸다.

눈에 익은 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나무들과 새들도 같은 소리로 나를 반겨주는 듯 했다. 눈길을 걸어 가면서도 추운 줄도 몰랐다.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걸음이 빨라졌다. 부지런히 뛰다시피 걸어 바깥 마당에서부터 엄마를 부르며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들과 엄마가 먼저 쫓아나오신다. 아버지도 손님들과 사랑채에 계시다 쫓아오셔서 맞아주신다.

따뜻한 숭늉을 한 대접 주시고 거친 손으로 내 손을 주물러 녹여주신다. 동생들에게도 학용품을 선물로 주고 부모님 내복과 털신을 드렸다. 엄마는 치수가 조금 넉넉하게 맞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복도 컸지만 신발은 커도 너무 컸다.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양말 하나 더 신고 신으시면 넉넉하게 맞는다고 하시며 좋아하셨다.

실망한 건 나였다. 눈대중을 못해서가 아니었다. 내 눈에 아버지는 언제나 거목처럼 크게 자리했다. 세상에서 제일 크셔서 모든 사람들이 올려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결코 크지 않았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 크지 않은 몸으로 끊임없이 부대끼며 사셨을 아버지의 험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과 흰머리가 보였고 나 때문에 애걸복걸 하시던 일들이 느릿느릿 지나갔다. 다음날 나를 터미널까지 배웅하고 돌아서 가시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은 지금도 옹이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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